도덕은 학습의 결과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수천 년을 이어져 온 이 논쟁은 철학사에 있어서도 가장 오래되었으며, 동시에 가장 뜨거운 화두가 아닐까 싶다. 가히 문제의 클래식이라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이 두 입장 모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의 결론은 조금 다르다. 나는 인간이란 본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굳이 나의 철학에 이름을 붙여보자면, 나는 이것을 ‘성무설’이라 부르고 싶다. 성무설의 핵심은 간단하다. “인간은 생존을 위한 본능만을 지닌 채 태어나며, 그 외의 모든 윤리적 성향은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다.”

성선설은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여, 교육과 환경만 잘 갖추어진다면 누구나 착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만든다. 그러나 현실을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하다. 그와 반대로 성악설은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존재라는 전제를 기반으로 통제를 정당화하며, 제도적 감시를 강화하는 논리로 작용해 왔다. 두 의견 모두 합당한 근거가 있기에, 잘못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인간이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은 어떻게, 누가, 어떠한 자격으로 증명하였는가?

우리는 종종 본능과 본성을 혼동하곤 한다. 예컨대, 어떤 아이가 친구의 장난감을 탐낸다고 해서 ‘본래 악한 존재’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 행동은 단지 결핍을 채우려는 생존적 충동으로부터의 행동, 다시 말해 본능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욕망, 즉 본능을 어떻게 해소할지,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설정할지는 학습과 환경의 문제이자 이성의 문제이다. 마치 타인의 음식을 보고 배고파하는 감정은 본능으로부터 기인한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빼앗을지 말지는 이성과 교육의 결과인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욕망의 유무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다. 만약 선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악한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 아이가 잘못되었다고 단정지어 말하기 보단, 그 환경에서 ‘악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가르쳐준 이가 없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도덕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마치 아이가 부모의 표정와 말을 통해 감정을 습득하듯이, 인간은 사회적 관계와 교육 속에서 태도와 사고를 습득하고, 또 길러간다. 동시에 그 길러짐과 습득은 결코 일회성이 아니다. 인간은 환경에 따라 계속해서 변하며, 어떤 삶을 살건 그 안에서 도덕의 형성은 평생에 걸쳐 현재진행형이다. – 나의 주장에서의 “교육”이란, 이러한 “환경”과 “영향”을 말하는 것이다. –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결국 이 오래된 논쟁은 인간을 ‘고정된 존재’로 보려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 본성인지조차 정의하지 못한 상태이다. 본성은 통계를 넘어 철학의 영역이며, 관찰의 결과보단 해석의 문제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묻는 것은 사실, 우리가 인간을, 우리 스스로는 어떤 존재로 보고 싶은가를 묻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이란, 결코 완성된 존재가 아닌, 끊임없이 조율되고 조형되는 존재라고 본다. 다시 말해, 끊임없이 적응하고, 변화하며,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한 적응의 과정에 있어, 악한 경향이 강한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에 대해서 똑바로 알려주는 이가 없다면, 나는 그가 당분간은 악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선한 경향이 강한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옳은 것과 옳지 못한 것에 대해 똑바로 알려줄 이가 있다면, 나는 그가 당분간 선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웃긴 예시이지만, 늑대와 함께 자라서, 인간보다는 늑대와 행동 양상이 비슷한 사람도 있지 않은가?

선도 악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인간이 되어, 어떤 삶을 살아갈지를 선택하는 과정 속에 있다. 그것이 인생의 정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존재이며, 도덕은 본성이 아닌, 교육과 이성의 문제이다.

2025년 6월 11일 (수) 문수현

덧붙이자면, 우리가 타인에 대해서 평가하거나, 생각할 때에 그의 인생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현재 모습만을 기준 삼아서는 안 된다. 그가 걸어온 길, 그가 나고 자라온 환경, 그가 배운 언어와 태도까지 포함해 바라보아야 한다. 글을 이해하기 위해 맥락을 살피는 것처럼, 인생의 맥락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단지 어렵다거나, 귀찮다거나, 혹은 내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외면한다면, 우리는 그와 우리의 가장 인간다운 가치이자,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가치인 ‘변화할 가능성’을 부정하고 배반하는 것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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